사자소통, 네 글자로 끝내라 ★★★★★ 이남훈 (성공의 기질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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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자성어 몇개를 찾아보았다.

각주구검(刻舟求劍) <刻 새길 각. 舟 배 주. 求 구할 구. 劍 칼 검. >
☆직역 - 배에 새겨 칼을 찾다
☆의역 -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다는 뜻.
☆유래: - 전국시대(戰國時代), 초(楚)나라의 한 젊은이가 양자강(揚子江)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.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. "아뿔사! 이를 어쩐다."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.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.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.
군계일학(群鷄一鶴) <君 무리 군, 鷄 닭 계, 一 한 일, 鶴 학 학>
☆직역 -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
☆의역 - 여러 평범 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의 비유.
☆유래: - 위진(魏晉)시대, 완적(阮籍), 완함(阮咸), 혜강(瑞康), 산도(山濤), 왕융(王戎) , 유령(劉伶), 상수(尙秀) 곧 죽림 칠현(竹林七賢)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가 있었다.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(河南省)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(老莊)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(淸談)을 즐겨 담론했다. 그런데 죽림칠현(竹林七賢) 중 위(魏)의 중산대부(中散大夫)로 있던 혜강(瑞康) 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.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되는 아들 혜소(瑞紹:? ∼304)가 있었다. 혜소가 성장하자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(吏部)에서 벼슬하던 산도(山濤)가 무제(武帝:256∼290,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 司馬炎)에게 상주(常住)하였다. "폐하, 서경(書經)의 강고편(康誥篇)에는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. (혜강은 도륙 당했음).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춘추시대 진(晉) 나라의 대부 극결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(비書郞)으로 기용 하시오소서."
"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(丞)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."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(秘書丞)으로 혜소를 등용했다. 혜소가 처음으로 낙양(洛陽)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 (王戎)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. "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.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'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[群鷄一鶴]'과 같더군요."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. "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."
계란유골(鷄卵有骨) <鷄 닭 계, 卵 알 란, 有 있을 유, 骨 뼈 골>
☆ 직역- 계란에도 뼈가 있다.
☆ 의역 -운수가 나쁜 사람의 일은 모처럼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무엇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.
☆유래: - 송남잡지(松南雜識)에 의하면, 세종 때 영의정(領議政)을 지낸 황희(黃喜, 號 : 尨村)는 마음이 착하고 생활이 검소하였다.
황정승의 생활이 매우 빈한한 것을 상감(上監)께서 궁휼히 여기시고 어떻게 잘 살게 할 방도를 생각하시었다. 한 묘안을 얻어 명령하시되 내일은 아침 일찍 남대문을 열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이 문을 들어오는 물건을 다 황정승에게 주신다고 하셨다.
그러나 그 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폭풍우가 몰아쳐 종일토록 멎지 아니하므로 문을 드나드는 장사치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.
그러다가 다 어두워 집에 들어갈려고 할 때 무슨 까닭인지 시골 영감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어 이것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와 곧 삶아 먹으려고 하니 알마다 곯아서 한 알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한다.

